한라산은 언제 가도,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순간, 산에 오르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번 산행에서 발견한 소중한 장면은 털진달래꽃이 만발한 한라산이다. 한라산 영실코스 산행에서 가장 좋아라 하는 나무는 사스래나무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나무인 사스래나무는 하얀 수피와 수형이 참 아름답다. 영실코스의 오르막, 계단으로 만든 데크 끝에는 선작지왓의 넓은 평원으로 가기 전 작은 숲을 만나는데 그곳에 사스래나무가 많이 분포해 있다. 구상나무, 주목, 조릿대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있지만, 영실코스에서는 경관의 주인공은 사스래나무다.
"사스래나무의 하얀 수피와 그물망처럼 뻗은 가지 사이로 털진달래나무의 연분홍 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스래나무 안쪽으로 털진달래 꽃이 활짝 피었다.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한라산의 봄기운을 앞장서서 뽐내고 있다. 5월이 다가오고 있지만, 한라산은 아직 이른 봄이다. 연둣빛 새 잎을 이제 막 밀어내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연분홍 꽃을 피워내는 털진달래는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녹나무의 파수꾼: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자리 잡은 녹나무의 장엄함과 박력에 압도되어 어떤 감상의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엄함과 박력에 압도되어 어떤 감상의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라산은 항상 그렇다. 그 장엄함과 박력에 압도된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그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른 아침, 등산로와 가장 가까운 주차장을 차지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성판악과 관음사로 정상을 올라가지 않는 이상 점심시간에도 입산이 허락되는 영실과 어리목은 많은 관광객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찾는 곳이지만, 여차하면 등산로 입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침 산행을 택한 것이다. 결론은 등산객도 없는 한적한 한라산을 오른다는 행운이 주어졌다. 코로나로 정신없는 이 시기에 관광객 없는 등산로를 상쾌하게 오른다는 게 복이었다.
4월의 마지막 주였지만, 아직 한라산은 새순을 밀어내는 나무들로 가득한 신록이라고 하나? 봄기운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한라산 진달래를 볼 수 있을까? 동행한 부모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나에게 여러 번 물어보셨지만, 난 진달래는 끝났을 테고 철쭉은 폈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말을 했다. 산 아래는 이미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러나 대반전, 오르는 등산로 곳곳에 털진달래 꽃이 피어 있었다. 5월을 향해가는데 진달래꽃이라니. 역시 산은 산이다.
미세먼지는 좋음이었는데, 시야가 뿌옇게 변해버려서, 영실 병풍바위가 선명하게 바라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 봐도 멋진 곳이다. 바위 밑으로 피신해 있는, 노랗게 말라있는 풀들도 초록초록 새잎을 올리고 있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봐야 보인다.
이쯤에서 보면 바다도 보이고, 시내도 보여야 하는데, 오늘은 가시거리가 별로다. 마른 나뭇가지의 흰 수피가 특색 있다.
털진달래 꽃이 특이하다. 보통의 진달래꽃보다는 색이 진한듯하고, 비닐로 만든 듯 반짝인다. 이런 질감의 꽃은 처음이다. 동네 야산의 진달래꽃을 허투루 여겼는데, 털진달래꽃은 귀하게 보인다. 작년 이맘때 한라산 참꽃의 매력을 발견하고 기뻤었는데 올해는 털진달래꽃이다. 이런 게 삶의 의미인 건가. 기분이 좋다.
하하하, 아무리 참꽃이라고 해도 누렇게 변해버린 조릿대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이 녀석은 언제쯤 관리가 되려나.
이날의 한라산에서 발견한 또 다른 질감은, 산 사면에 아직 잎을 내밀지 못한 나무 가지 아침 햇살을 받아서 만들어낸 패턴이 새롭다.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등산 중 숨을 고르는 찰나에 흥미 있게 눈에 들어온, 치밀하게 그려진 가지들의 단체사진. 이 모습이 그동안 못 봤던 한라산의 또 다른 모습이다. 딱 이 순간이 아니었으면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는데, 그 순간을 포착했다는 것 만으로 마음이 벅차다.
노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강했던 겨울을 보낸 풀 사이로 초록색 새잎이 나오는데, 사람이 노랗게 머리 염색하고 뿌염을 안 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겨울을 보낸 주목, 죽은 주목의 하얗게 마른 가지가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하산 중 발견한 생태, 환경 조사원? 들이 몇몇 있었는데, 다 이런 생태계 변화를 조사하고 있는 거겠지? 자연의 변화를 거스를 수 있는 해답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구상나무의 열매는 처음이다. 빨간 주목의 열매는 여러 번 봤지만, 구상나무는 한라산이나 와야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열매가 열리는 시즌에 한 번도 등산한 적이 없었던 거다. 이 또한 기분 좋은 발견이다.
선작지왓에 도착하니, 저 멀리 아니 가까이 우뚝 솟은 백록담 분화구가 보인다. 이번 산행은 남벽분기점까지였지만, 윗세오름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컨디션 난조로 1시간 남짓한 남벽분기점까지의 산행은 포기하고 내려왔다. 산행은 무리하면 절대 안 된다. 산행은 절대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하산길은 또 다른 경관을 선사한다. 앞만 보고 올라오던 우리가 못 봤던 경관. 원래 경사로는 데크로 만들어진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선작지왓으로 향하는 숲 속도 데크길로 만들었다는 것을 몰랐었다. 걷기 참 편하다.
영실기암, 오백장군님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해봤다.
하산길에 바라본 병풍바위는 좀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거의 다 내려와서는 맑은 계곡물, 그 소리가 참 시원하다. 그리고 신록이 더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등산하기 전 주차장에서는 항상 이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는데, 오늘은 등산의 끝에 담았다. 식생의 켜, 레이어가 느껴지면서 단풍나무와 소나무(적송), 그리고 바위가 겹겹이 만들어낸 풍경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