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가?

2021. 7. 25. 13:16제주살이/제주살이와 무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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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학원생 신분이 끝나고 재취업의 늪에 빠져있을 때였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나름 조경업계에서 보수가 괜찮다는 대기업 서너 곳에 원서를 넣고 면접 1, 2차까지의 외줄타기를 한참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경력직으로 지원했던 S사는 필기시험 없이 바로 면접을 봤다. 나름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면접에서 전략도 매력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지금 생각해도 꽝인 면접이었다. 면접관이 나였어도 뽑아줄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듯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달을 넘게 결과를 기다렸지만, 친절하지 못한 그 대기업은 면접 결과에 대한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또 다른 큰 회사, E는 서류부터 면접 1, 2차에 PT발표 까지, 나름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여기 또한 탈락이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10년 전 조경업계의 채용은 구직자를 배려하는 문화가 단 1도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 졸업을 기념하여 2011년 1월, 한 겨울에 찾은 제주도, 직장을 여기에서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설계사무소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설계업을 포기하고 공기업, 엔지니어링업체 같은 곳을 두드리느냐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경력직으로 조경직을 채용한다는 공고문을 우연하게 보게 됐다. 공기업인 이 회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1도 없었지만, 제주에서 대학을 다녔던 대학원 동기가 “거기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제주도라면 다른 지방도시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이 있었고, 취업이 힘들어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진 나에게 지금의 와이프가 “지방이라도 좋으니 지원해봐”라는 응원 한마디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찍게 되었다. 와이프는 알고 있을까? 그 한마디에 본인의 인생도 확 바뀌게 된 것을.

시간의 속도는 빠르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2009년 설계사무소가 싫어서 대학원으로 도망갔지만, 인생의 20대, 10년을 온전히 조경설계에만 집중했는데, 설계업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이 30에 구직활동을 오랜시간 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방이라도 좋으니 일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운이 좋아 합격을 했다. 운이 좋았다는 건 공기업이지만 지금처럼 NCS 같은 시험도 없었고, 경력직 채용이라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두 장으로 순조롭게 최종면접까지 올라갔다. 최종면접에서 경력이 화려한 경쟁자는 너무 화려해서, 회사는 그를 뽑을 수 없었고 차선책으로 내가 뽑히게 됐다. 경력이 화려한 그에게 이 회사의 생각보다 적은 보수로 제주도에 정착해서 산다는 게 장기근속의 악조건이라는 건 지원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인사담당자는 알고 있었던 거다. 결론적으로 난 장기근속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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